배 출발 20분 전이었다.
나는 제주항국제여객터미널에 서 있었고, 가족은 제주항연안여객터미널에 서 있었다. 두 터미널은 다른 곳이다. 거리는 1km가 넘는다.
20분. 1km. 혼자였다.
열흘짜리 제주 가족여행의 마지막 날, 귀항 직전 이야기다.

퇴근하고 바로 출발
5/29 저녁. 퇴근하고 집에 잠깐 들렀다가 바로 출발했다. 차 안에서 다 같이 손을 모았다. 화이팅. 그걸로 됐다. 열흘짜리 휴가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부여백제휴게소에서 저녁을 때웠다. 휴게소 밥이 그날따라 특별히 맛있었던 건 아닌데, 먹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강진 더원비지니스호텔에 도착한 게 밤 11시 반이었다. 강진 반값여행 페이백으로 결제한 숙소였다. (강진 반값여행 신청 방법 후기) 서울에서 강진까지 세 시간 넘게 운전했는데 전혀 안 힘들었다. 설레면 다 이렇게 된다.
5/30 아침. 완도 빠리바게뜨에서 소금빵, 피자빵, 마늘빵, 아메리카노로 아침을 먹었다. 배 타기 전 마지막 육지 끼니였다.
완도-제주 카페리 위에서
가족은 완도 터미널 앞에서 내려줬다. 나 혼자 차를 몰아 선적하러 갔다. 1층 배정. 어두운 선착장으로 들어가서 직원 안내에 따라 줄을 맞추면서 들어갔다. 앞차, 내 차, 뒤차가 차곡차곡 채워지는 방식이었다.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고 나서야 실감이 왔다. 이 차가 제주도까지 간다.
2018년 이후 처음 타는 카페리였다. (완도-제주 카페리 예매 방법)

배 위는 생각보다 볼 게 많았다. 라면이랑 맥주 파는 매점, 스타벅스, 인형뽑기, 유료 안마의자. 근데 다들 갑판으로 나갔다. 가족도, 나도, 다른 사람들도.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불었다. 머리카락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무도 안 들어갔다. 신나서. 갑판을 한 바퀴 돌고, 뱃머리 쪽으로 가보고, 난간에 기대서 바다를 봤다. 그냥 서 있었다. 사진도 찍었는데 머리카락이 얼굴을 다 덮은 사진들만 나왔다.
항구를 빠져나올 때 빨간 등대랑 하얀 등대가 양쪽으로 서 있었다. 등대 밑 테트라포드에 낚시하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 운치 있었다. 등대가 뒤로 빠지는 그 순간이었다. 아, 진짜 시작이구나.

자리 잡고 앉았다가, 갑판 다시 나갔다가, 객실로 돌아와서 누웠다가. 그러다 보니 도착 방송이 나왔다. 차를 몰고 나오자마자 차 안에서 "제주도 푸른 밤"을 틀었다. 제주 올 때마다 하는 루틴이다. 노래가 나오면 진짜 제주에 온 느낌이 든다.
제주 동쪽 코스 먼저
숙소는 서북쪽 한림에 있었다. 동쪽을 먼저 한 바퀴 크게 돌고 오기로 했다.
첫 번째 포인트는 조천 돌탑공원이었다. 현무암으로 쌓은 탑들이 올레 18코스 옆에 줄지어 있는 곳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는 곳. 그 근처에서 해장을 했다.


해장살롱.
함덕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집이다. 차돌해장국이랑 내장탕을 세트로 시켰다. 국물이 칼칼하고 진했다. 아침부터 내장탕을 먹는 집이 제주에 우리밖에 없을 것 같았는데 다들 잘 드시고 있었다. 그릇도 이뻤고 인테리어도 깔끔했다. 뭔가 대비가 잘 됐다. 내장탕인데 분위기가. 르쿠르제 그릇에 나오는 내장탕이다. 그 묵직한 주물 냄비에 담겨 나오니까 마지막 한 숟갈까지 온도가 유지됐다. 식어서 먹다가 결국 맛없어지는 그런 국물이 아니었다.


서우봉은 초입 언덕까지만 올라갔다. 정상까지 굳이 안 가도 됐다. 내려다보이는 바다, 모래사장, 그 위에서 해수욕하는 사람들. 6월 초인데 바다에 사람이 꽤 있었다. 거길 내려다보면서 금능가면 저렇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북촌 창꼼은 구멍 뚫린 바위 포토스팟인데 딸이 좋아했다. 바위 구멍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각도가 있다. 딸은 그 각도를 한참 찾았다.

아일로사는 온갖 색깔 장미가 가득한 정원이다. 북촌 마을 안쪽에 있다. 입구에서 티켓 끊고 들어가면 그냥 장미밭이다. 예쁘긴 예뻤다. 들어가면 음료 한 잔 같이 준다. 이번 여행 후반에 수국정원 답다니도 갔는데, 비슷한 결이었다. 한쪽은 장미, 한쪽은 수국. 같은 구조, 다른 꽃. 아일로사는 안젤라 장미, 로코코 장미 같은 이름 있는 품종들이 섞여 있어서 가까이 들여다보면 색이 다 다르다. 향기도 구역마다 달랐다. 걷다 보면 코가 먼저 안다, 여기 다른 종류다.



동쪽을 한 바퀴 다 돌고 나서 금능으로 넘어가면서 첫날부터 진이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열흘이니까 아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근데 이미 늦었다.
저녁은 금능반지하를 처음으로 가봤다. 금능포구 근처에 있는 술집인데, 주방이 반지하고 마당에 각양각색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구조였다. 슈바인학센이 메인이라고 했다. 맛있었다. 껍데기는 바삭하고 속은 뭉텅이로 찢어지는 게 나왔다. 겨자소스랑 찍어 먹으니까 딱이었다. 맛에도 취하고, 술에도 취하고, 분위기에도 취했다. 근데 밤늦게 가서 해질녘은 놓쳤다.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금능에서 시간을 보내다
이번 여행의 진짜 핵심은 금능해수욕장이었다.
물 색이 제주에서도 특별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그 말이 맞았다. 에메랄드빛이라는 표현이 그냥 수사가 아니었다. 얕은 구간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바닥이 비치는 구간이 길었다. 모래가 흰색이라 빛이 반사되는 방식이 달랐다.
차를 가져간 덕에 짐을 풀로 챙겨갔다. 보트도 가져갔다. 바람을 넣어서 부풀리는 고무보트. 그걸 들고 바다에 들어가서 누웠다.


아무것도 안 했다. 하늘 보면서 그냥 떠 있었다. 파도가 조금씩 방향을 바꾸면 몸이 따라 돌아갔다. 바뀐 방향에서도 하늘은 거기 있었다. 물이 얕은 구역이라 발을 내리면 바닥에 닿을 것 같았는데 닿지 않았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게 동동 떠 있는 게 좋았다. 그렇게 한 시간은 있었던 것 같다.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와이프랑 딸의 시간이 됐다.

두 사람은 비닐봉지를 들고 바다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물이 빠지면 현무암 바위들이 드러난다. 게는 그 바위 틈에 숨어 있었다. 와이프가 먼저 웅크리고 앉아서 틈을 들여다봤다. 딸은 그 옆에서 봉지를 벌리고 서 있었다. 눈이 틈에 고정된 상태로.
바위 틈에서 뭔가 움직이면 작은 비명이 났다. 기뻐서 나는 소리였다. 와이프도, 딸도. 그 비명이 들릴 때마다 나는 모래 위에서 고개를 들어 봤다. 두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서 뭔가를 잡는 장면. 그게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구경하는 사람, 저요.


처음에는 같이 들어가서 같이 바위 틈을 들여다봤다. 두 번째부터는 그냥 봤다. 봐야 할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 장면을 보는 게 더 좋았다. 잡히는 게 줄어들면 구역을 옮겼다. 바위가 많은 쪽으로, 조금 더 깊은 쪽으로. 새우도 잡혔다. 봉지 안에서 게랑 새우가 같이 움직이는 걸 딸이 들여다봤다.
나중에 서울 올라오는 차 안에서 딸한테 제주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었다. 여기라고 했다. 금능해수욕장, 게 잡기.
금능에서 어디에 자리 잡고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는 금능해수욕장 따로 쓴 후기에 더 자세하게 남겼다.
날이 흐린 날도 금능에 갔다.
파라솔 치고 의자 세팅하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미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그냥 앉아 있었다. 파라솔 아래에서 바다를 봤다. 아무것도 안 했다. 파도 소리, 빗소리. 멍 때렸다.
그 시간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고요한 시간이었다.


날 좋은 날엔 파라솔 밑에서 치킨을 배달시켰다. 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캬.
이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상황이 있다. 그날이 그랬다.


금능반지하, 두 번째
해질녘에 다시 갔다.

첫 번째 방문 때와 같은 자리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하늘이 점점 색이 바뀌고 있었다. 주황색이 됐다가, 붉어졌다가, 서서히 가라앉는 그 타이밍에 앉아 있었다.
양치기개, 다리 짧은 개, 고양이가 마당에 풀려 있었다. 손님 반응에 따라 가두기도 하고 놔두기도 한다고 들었다. 우리 테이블 앞으로 왔다가 갔다가 했다. 고양이가 의자 밑으로 들어왔다. 그냥 뒀다. 다리 짧은 개가 테이블 밑을 한 번 킁킁거리다가 옆 테이블로 넘어갔다. 돌아다니는 애들이 있으면 더 시끄러워야 하는데, 오히려 조용했다. 다들 그냥 각자 있었다.
모닥불을 켜줬다. 6월 초 제주 밤은 생각보다 쌀쌀하다. 담요도 있었다. 불 앞에 앉으니까 좋았다. 슈바인학센이랑 몇 가지를 시켰다. 다 맛있었다. 먹는 것도 있었고, 마시는 것도 있었고, 그냥 앉아 있는 게 있었다. 세 가지가 동시에 됐다.


자연에 취한다는 게 이런 건지 몰랐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저녁에 취했다.
첫 번째는 맛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했다. 두 번째는 거기에 자연까지 더해졌다. 같은 자리인데 다른 곳이었다.
아침 자전거
2호기를 차에 실어서 제주까지 가져갔다. 자전거를 챙겨가길 잘했다는 생각은 타고 나서 5분 만에 들었다.
6/1 아침, 해거름마을공원 인증센터 방향으로 왕복 10km 정도.
6/3 아침, 다락쉼터 인증센터까지 왕복 35km.
이른 아침 제주 해안도로였다. 한쪽에 바다, 한쪽에 한라산. 이 두 개가 동시에 보이는 도로를 달리는 거다. 바람이 뺨에 부딪혔다. 파도 소리가 계속 들렸다. 오르막이 나오면 페달을 눌렀고, 내리막이 나오면 그냥 뒀다.


골목으로 들어갔다. 제주 골목은 어딜 들어가도 느낌이 있었다. 돌담, 귤나무, 어느 집 앞에 세워진 오래된 자전거. 방파제 위로 올라가서 바다 쪽을 봤다. 등대 밑으로 내려가서 거기 앉았다. 잠깐 멍 때렸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없었다. 갈매기 소리만 들렸다.
35km를 타고 와서 씻고 가족을 깨웠다. 같이 아침을 먹었다. 온몸이 풀려 있었다. 자전거 타는 것만 혼자였다. 나머지는 다 같이. 이른 아침 혼자 달리다 돌아와서 같이 밥 먹는 그 루틴이, 이번 여행에서 내 것이었던 것 같다.
제주 열흘 동안 돌아다닌 곳들
금능과 한림을 기점으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다. 장소마다 조금씩 달랐다.
금오름
주차장에서 정상까지 30분, 포장된 길이었다. 가족이 다 같이 올라가기 딱 좋은 오름이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서 딸도 힘들다는 말 없이 올라갔다.
비 온 다음 날 갔더니 정상 분화구에 물이 고여 있었다. 평소엔 없다고 했다. 분화구 바닥에 물이 찬 걸 내려다보는 게 묘했다. 화산이 만든 구덩이 안에 빗물이 모인 거니까, 지질학적으로 되게 긴 이야기인데 눈앞엔 그냥 웅덩이였다. 이렇게 물이 고인 상태를 금악담(今岳潭)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정상에서 바다랑 비양도가 내려다보였다. 날이 맑았다. 능선을 따라 한 바퀴 천천히 걸으면 한라산, 비양도, 수월봉 방향이 다 보인다. 360도가 다 열려 있는 곳이라 어디를 봐도 막히는 게 없었다. 바람이 꽤 셌다. 정상에 서 있으면 그 바람이 온몸으로 왔다. 잠깐 앉아 있다가 내려왔다.
김창렬 미술관
기대 없이 들어갔다.
물방울 작가인 건 알았다. 미술관이 크지도 않고, 솔직히 그냥 잠깐 보고 나오려고 들어간 거였다. 근데 프랑스 신문지에 그린 초창기 물방울 작품이 있었다. 신문 인쇄된 글씨 위에 물방울이 그려진 거다. 인쇄된 글자가 물방울 안에서 굴절되는 게 보였다. 직접 보면 다르다는 말을 이때 이해했다.
돌 전시랑 같이 배치해놓은 게 묘하게 잘 어울렸다. 제주 돌이랑 물방울이랑. 둘 다 물이 만든 거라는 걸 그 앞에서 처음 생각했다.
생각보다 오래 있었다.
수월봉과 엉알해안
날씨가 완벽하게 받쳐줬다. 그날따라 하늘이 유독 맑았다.
수월봉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색이 여러 개였다. 가까운 쪽은 밝고, 먼 쪽으로 갈수록 짙어졌다. 차귀도가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섬이 가깝지 않은데 선명하게 보였다. 고기후변화감시소 건물이 봉우리 옆에 있었다. 현대적인 건물인데 이상하게 자연이랑 안 어울리지 않았다. 묘했다. 바람이 계속 불었다. 이 봉우리가 제주 서쪽 끝이라 차단되는 게 없다. 여기 일몰 명소라는 말을 이해했다. 해가 차귀도 위로 떨어지는 타이밍이 딱 맞으면 그림이 된다고 했다.


엉알해안은 수월봉 밑으로 이어지는 해안이다. 올레 12코스 구간에 포함된 길이기도 하다. 입구에서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화산암 단면이 겹겹이 쌓인 절벽이 나온다. 켜켜이 쌓인 층들이다. 약 1만 8천 년 전 화산 활동으로 쌓인 화산재가 파도에 깎여서 드러난 단면이라고 한다. 이게 언제 쌓인 건지, 몇만 년치인지 설명판에 써 있었는데 읽지 않았다. 그냥 봤다.


입구 근처 돌에 앉아서 한참 있었다. 바람이 생각을 다 날려갔다.
신창풍차해안
풍력발전기가 바다 위에 줄줄이 서 있는 곳이다. 국내 최초 상업용 해상풍력단지라고 한다. 가까이서 보면 소리가 비행기 엔진 같았다. 낮고 우렁찬 진동음이 계속 났다. 날개가 돌아가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멀리서 볼 땐 느릿느릿 돌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바람을 받으면서 꽤 세게 돈다. 규모도 실제로 보면 그림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다.
바다 위로 이어지는 데크 다리를 걷고 싶었는데 금능 물때를 맞춰야 해서 패스했다. 다리 끝에 신창등대까지 연결된다고 한다. 다음에 제주 오면 여기 다시 와서 끝까지 걸어보고 싶다.
청굴물
제주 동쪽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곳이다. 용천수가 솟아나는 자리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쓰던 물통이 남아 있다. 인피니티풀처럼 생겼는데, 인공으로 만든 게 아니라 원래 거기 있던 지형이다.



물때를 맞추지 않고 그냥 갔는데 타이밍이 잘 맞았다. 파도가 들어왔다 나갔다 할 때마다 탕 안의 물이 따라서 움직였다. 나가는 물이 빠질 때 작은 소용돌이들이 생겼다.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에. 크기가 다 달랐고, 생겼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다.
물이 맑아서 바닥이 훤히 보였다. 얕아 보였는데 실제론 꽤 깊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짠 맛이 줄었다. 용천수가 섞이는 거라고 했다. 수조 끝에 걸터앉으면 발아래로 탕 안의 물이 보이고, 눈 앞으로 바다가 바로 펼쳐진다. 안쪽과 바깥쪽의 파란색이 서로 다른 파란색이었다.
날씨가 안 좋아서 수영은 못 했다. 소용돌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기했다. 물놀이 목적으로 가려면 만조 전후가 낫다고 하는데, 간조 쪽이 용천수 자체를 보기엔 더 좋다. 용천수가 연중 15도 안팎이라고 하니까, 여름에 들어가면 뼛속부터 식겠다 싶었다.
만장굴과 비자림
만장굴은 최근에 다시 오픈했다고 했다. 입구에서 들어가면 곧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다. 어두워지면서 공기가 서늘해졌다. 15도라고 했다. 6월 밖이랑 온도 차이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벽면에 용암이 흘렀다 굳은 층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조명이 어두운 편이라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중간까지만 들어갔는데도 충분히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 들어가면 되돌아오는 길이 멀어진다는 계산이 나왔다.


비자림은 와이프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갔다. 올 때마다 좋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 몰랐다.
들어가자마자 알았다.
비자나무가 양쪽에서 하늘을 덮고 있었다. 수백 년 된 나무들이라는 게 눈에 보였다. 줄기가 굵고, 가지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길이 부드러웠다. 흙이 발에 흡수되는 느낌. 비 온 후라 바닥이 질퍽거렸는데, 그게 오히려 더 깊은 숲 안에 들어온 느낌을 줬다. 빛이 나무 사이로 조각조각 들어왔다. 정확히 어디서 비추는 건지 알 수 없는, 저절로 어두운 숲.
코가 뻥 뚫렸다. 진짜로. 들이쉬면 다른 종류의 공기였다. 피톤치드가 뭔지 이런 데서 실감하는 거다. 화산송이가 깔린 길이라 발바닥에서 흡수되는 느낌도 달랐다. 도시 바닥이랑 다른 탄성이 있다. 나무 2,500여 그루가 있고 수령이 500 ~ 800년짜리들이라고 한다. 천연기념물이다. 개인적으론 사려니숲길을 더 좋아하는데, 이번엔 못 갔다. 비자림도 충분히 좋았다.



헬로키티 아일랜드와 소품샵 순례
딸이 헬로키티 팬이다. 코스에 넣었다. 어릴 때 왔었는데 커서 다시 온 거라고 했다. 어릴 때랑 어떤 게 다르냐고 물었다. 더 좋다고 했다.
기념품샵에서 한참 있었다. 뭘 고르는 게 아니라 다 보는 거였다. 나는 입구 근처에 서 있었다. (헬로키티 아일랜드 상세 후기)


이번 여행에서 딸이 요청한 소품샵 코스를 포함해 약 10곳쯤 돌았다. 후르츨리, 가르송티미드, 도두수퍼마켓, 바이제주. 괜찮았던 곳들이다.


출발 전에 딸 카드에 20만 원을 넣어줬다.
서울 오는 차 안에서 잔액을 확인했더니 2 ~ 3만 원이 남아 있었다.
텅장.
올레시장
초당옥수수 사러 갔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시간이 맞지 않았다. 올레시장은 낮에 닫고 야시장은 저녁 5시부터 열리는데, 그 사이 타이밍이었다. 아쉬웠는데 야시장이 열려 있었다. 흑돼지탕수육이랑 흑돼지강정을 포장해서 숙소로 돌아갔다. 야시장 안에 조명이 켜지기 시작하면 분위기가 바뀐다. 낮 시장이랑 다른 곳이 된다. 봉지째로 들고 왔더니 숙소 도착할 때쯤 다 식었다. 식은 채로 먹었다. 맛있었다. 식어도 맛있으면 더 좋은 거다.


딸은 시장 안 소품샵을 한 바퀴 더 돌았다. 카드 잔액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점이었다.
남국사
시내 안에 있어서 별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들어가자마자 조용해졌다.
나무가 많았다. 건물보다 나무가 더 눈에 들어왔다. 삼나무들이 경내 안에 줄지어 있었다. 그 그늘 아래 길이 이어졌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발소리가 났다. 수국으로 유명한 곳인데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피지 않았다. 봉오리들만 있었다. 초록색이었다. 6월 중순이 만개 시기라는데, 타이밍이 조금 아쉬웠다. 수국이 피는 시기에 오면 다른 곳일 것 같았다. 다음에 꼭 수국 때 오고 싶다.


기대 없이 들어갔다가 정화되고 나왔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좋았다.
고향역과 금능식당
고향역은 계획 없이 들렀다. 돼지국밥이랑 고기국수를 파는 집이었다. 가마솥 육수, 인공적인 맛이 하나도 없었다. 소금이랑 새우젓을 추가하면 딱이었다. 이런 집을 계획 없이 들렀을 때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지 원래 맛있는 건지.

금능식당은 고사리해장국, 몸해장국, 고기국수. 아침부터하는 집이었다. 한림리조트 조식이 질릴 때 나와서 먹기 딱이었다. 리조트에서 나와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닌데, 차로 10분이면 됐다.

용머리 — 또 못 들어갔다
파도가 높아서 또 못 들어갔다.
제주를 열댓 번은 왔다. 용머리 해안은 올 때마다 들어가려고 하는데, 파도가 높거나 안전 문제로 통제됐거나 해서 매번 밖에서만 봤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입구까지 가서 상황 확인하고 돌아왔다. 나중에 알았는데 방문 전에 서귀포시 공영관광지 인스타(@6sot_official)에서 당일 개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알았으면 더 일찍 확인하고 갔을 텐데.


언젠간 꼭 들어간다.
송악산은 가다가 1/4만 돌고 내려왔다. 사계해변은 그 길에 잠깐 들렀다. 지형이 특이한 곳인데, 처음엔 지나치다가 멈추게 된다. 지난번에 우연히 발견한 후로 제주 오면 들른다.

남경미락
돌돔을 추천받아서 갔다. 용머리해안에서 차로 3분 거리다. 창가 자리를 받았는데, 멀리 용머리해안이 보였다. 못 들어가는 용머리를 밥 먹으면서 창문으로 봤다. 다음엔 꼭 들어가야지.
맛은 있었다. 근데 돌아오면서 내린 결론은, 제주 회는 하나로마트 회가 최고라는 거였다. 이게 틀린 말이 아닌 게, 제주 마트 회가 진짜 좋다. 가격도 그렇고 신선도도.



마지막 날 저녁, 왕서방
마지막 날 낮이었다. 왕서방이라는 중국집에 갔다.
탕수육은 케찹 소스 계열이었다. 와이프가 좋아하는 타입이다. 웨이팅이 있고 음식이 느리게 나오는 집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다들 별말이 없었다. 피곤하기도 했고, 내일 배 타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음식이 나왔다.
볶음밥이 킥이었다. 왕서방 가면 볶음밥은 무조건 시켜야 한다. 이게 왜 이렇게 맛있는지 모르겠는데, 탕수육보다 볶음밥이 더 생각나는 집이었다.



마지막 날 낮을 볶음밥으로 마무리했다.
귀항 — 제주 열흘의 마지막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마지막 날 아침. 차를 9부두로 몰았다. 선적하고 선적 확인서를 받았다. 안내대로 셔틀을 타고 터미널로 이동했다. 터미널에 내렸다.
가족이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사람들 사이를 한 번 둘러봤다. 없었다. 전화를 했다.
와이프가 터미널에 있다고 했다. 나도 터미널에 있는데 이상하다고 했다. 잠깐 침묵이 있었다. 와이프가 뭔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 연안여객터미널에 있는데."
그때 처음 알았다. 제주항에 터미널이 두 개다. 제주항국제여객터미널과 제주항연안여객터미널. 이름이 비슷해서 같은 곳인 줄 알았다. 다른 곳이다. 거리가 1km 넘는다.
그리고 배 출발까지 20분이었다.
눈앞이 하얘졌다. 생각이 멈췄다가 다시 시작됐다. 뛰는 것보다 택시가 빠르다. 택시를 잡아야 한다. 주변을 봤다. 마침 택시가 한 대 서 있었다. 기적이었다. 뛰어서 탔다. 연안여객터미널이라고 했다. 가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했다.
터미널에 내렸다. 막차 셔틀이 있었다. 간신히 탔다. 배에 올라갔다. 가족이 보였다.
와이프가 말했다.
"뭘 큰일나, 비행기 타고 김포 가면 되지."
열흘 내내 아무것도 안 하고 잘 쉬다가, 마지막에 혼자 조금 뛰었다.
돌아가는 배 위에서
올 때와 돌아갈 때 배 위 분위기가 이렇게 다른 줄 몰랐다.
올 때는 다들 갑판에 나와 있었다. 바람 어마어마한데 아무도 안 들어갔다. 설레서. 돌아갈 때는 객실 만석에 다들 누워서 잠을 잤다. 피곤했고, 다 했으니까.
나만 갑판이랑 매점을 돌아다녔다. 매점에서 맥주 하나 사서 갑판으로 나갔다. 바람이 여전히 셌다. 서 있었다.
열흘이 다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파도 소리인지, 바람 소리인지, 아니면 그냥 배 엔진 소리인지. 뭔지는 몰랐다. 서 있었다.
완도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이어트 시즌1 최저 89.4kg을 찍고 열흘 다녀왔더니 90.9kg이었다. (89kg 찍고 제주도 다녀왔더니 90.9kg — 40대 다이어트 시즌2 선언) 예상한 숫자였다. 예상했는데도 잠깐 봤다가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다. 잘 먹었으면 올라간다. 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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